유현상은 1971년에 록 밴드 Last Chance의 리드 싱어로 활동하다가 1976년 재즈 록 밴드 사계절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고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대한민국 육군 사병 복무 이후, 1981년에 솔로 가수로 전향하였으며, 1982년 록 밴드 사랑과 평화의 보컬리스트로 잠시 활동한 후 1986년 헤비 메탈 밴드 백두산을 결성하고 보컬리스트로 활동하였다.
목차
1. 유현상 프로필
2. 백두산 데뷔 전
3. 그룹 백두산 결성 계기
4. 백두산 리즈 시절
5. 트로트 전향 이유
유현상 프로필
- 본관 : 진주 류씨 토류계
- 출생 : 1954년 1월 30일
- 고향 : 경기도 동두천시 탑동동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 동두천고등학교 (졸업)
- 광운대학교 (산업공학 / 학사)
- 광운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
- 가족 : 처제 최윤정, 부인 최윤희, 아들 유동균, 유호균
- 종교 : 개신교(침례회)
- 데뷔 : 1976년 재즈 록밴드 사계절
유현상 프로필 나이 부인 최윤희 과거 백두산 그룹 리즈 너라서
유현상 백두산 데뷔 전
유현상은 그 또래 음악인들이 대개 그러했듯 미8군 그리고 밤무대 출신이다. 방송에 같이 출연해서 밝힌 내용으로 인순이와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이인데 미8군 무대에도 같이 섰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 그룹 '라스트 찬스' (후기) 로 무대 데뷔를 했었으며, 76년 사계절이라는 그룹의 기타리스트로 음반 데뷔.
유현상은 사랑과 평화가 대마초 파동으로 방송이 금지되어 나이트클럽을 뛰던 시기의 멤버였으며, 문화방송 전속 관현악단의 기타리스트로도 활동했다. 물론 80년대 테크닉의 절정을 보여줬던 기타리스트들과의 비교는 힘들지만, 그 전세대의 기타 리스트로서 유현상의 커리어도 상당한 편이다.
오히려 보컬 유현상보다는 기타리스트 유현상으로서의 평가가 더 높은 경우도 있다.
유현상 그룹 백두산 결성 계기
유현상은 절친노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원래 백두산에서 보컬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 유현상의 시작은 기타리스트였다. 그러나 보컬을 모집하다가 적당한 사람이 없어 자신이 했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는 서라벌 레코드사의 음반 기획 부장으로 활동하다가 헤비메탈 붐이 일자 사비를 털어 당시 이태원 등지에서 활동하고 솔로몬이란 밴드에서 활동하던 기타리스트 김도균을 스카웃하여 백두산을 결성하게 된 것.
유현상 백두산 리즈 시절
부활, 시나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방송에 얼굴을 내밀면서 대한민국에 일종의 락 열풍을 몰고 왔는데, 후발주자인 백두산은 사운드 자체로는 가장 하드하지만, 멜로디 라인은 뽕끼가 섞인 묘한 한국적 메탈 사운드로 팬층을 확보하였다. 1집의 최고 히트곡은 "어둠 속에서" 였는데 중후한 헤비사운드에 유현상의 호소력있고 힘있는 보컬이 매력적인 수작이었다.
유현상의 목소리는 거칠고 터프한 매력이 있는 반면 음역대는 그리 높지 않았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방송에서는 '샤우팅'으로 불리는, 특유의 창법으로 보완했다. 1집때는 이 창법을 코러스 정도로 이용했지만, 2집에서는 이 창법을 전면적으로 들고 나왔는데 초반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리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유현상의 이 창법과 헤비메탈에 가까워진 사운드는 당시로서는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았고, 2집에서는 주연배우, 말할걸, Up In The Sky 등이 히트 하면서 시나위 부활 등과 함께 당시 국내 3대 헤비메탈 밴드의 선두 주자에 서게 된다.
실제로 김경호, 윤도현과 같은 현재의 한국 록의 거목들이나, 김태원 또한 인터뷰에서 백두산의 연주력이나 파괴력, 유현상 특유의 샤우팅 창법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등 립서비스나 실제로 현재 록 판에서도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선구자로서의 대우도 많이 해주는 편이다.
유현상 트로트 전향 이유
유현상은 90년대 초 결국 그는 머리를 자르고 트로트 가수로 변신 여자야를 발표해서 락 음악 후배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가혹하고 충격적인 변신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그 여파나 충격이 심했는데, 트로트 가수로 성공한 후에도 일요일 일요일 밤에나 다른 쇼 프로에서도 유현상의 리즈시절을 농담 따먹기 식으로 이야기 했다.
사실 가족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면서 부양의 문제가 생겼고 결국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고 후에 기술했다. 하지만 트로트를 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고 한다. 이런 행동의 반작용으로 여자야를 부르던중 백두산의 팬들이 그에게 실망하여 유현상을 질타하며 물병을 투척하거나, 얼마 줄테니깐 백두산 노래 부르라고 하는 둥 개인적으로 수난도 상당했다고 한다.
유현상 부인 최윤희
유현상 부인 최윤희는 아시아의 인어로써 유현상은 결혼으로 인해 범국민적 패닉을 부르며 질시와 부러움과 저주를 한 몸에 받는 대한민국 남성들의 공공의 적 자리에 올랐다.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3관왕,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수영 2관왕인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와의 결혼은 그야말로 쇼킹 그 자체로 백두산 이후로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당시 최윤희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으로 현재의 스포츠 스타 손연재와 김연아를 합친 셈이다. 최윤희가 포카리스웨트 CF를 찍었던 때 무려 광고료로 1억원을 받았다. 나이 차이(최윤희가 1967년생으로 유현상보다 14살 연하)도 꽤 나는 편인데, 행복하게 잘 사는 듯 하다. 자식들이 바라보기에는 오히려 최윤희가 유현상을 더 사랑한다.라고 한다. 둘이 결혼할 때 최윤희의 집에서 결사반대를 했는데 이 때 최윤희가 단식투쟁을 해가며 결혼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이루어졌다.
유현상 근황
유현상은 현재는 백두산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제작자로 다시 부활하였다. 백두산의 성인가요 활동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면 그 후에는 다시 백두산 쪽의 일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하며 현재는 앨범 작업 중이라고 한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유현상의 열린 음악회라는 바를 운영했지만, 문을 닫았다. 실제로는 상당히 젠틀하며 자상하다고 한다. 매너도 좋고. 현재 장윤정 못지 않게 행사를 많이 뛰고 있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중 2020년 11월 4일 라디오 스타에 게스트로 출연해 오랜만에 방송출연을 했다. 2022년 8월 19일 이십세기 힛-트쏭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Up in the sky를 열창하였다. 그리고 최근 2020년 이후 4년만의 정규앨범 신곡 ‘그게 나야’로 가요계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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